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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어

스페인어와 젠더 : 언어 속 성별 표현의 딜레마

1. 들어가기 : 언어와 사회, 젠더의 교차점

 언어는 단순히 생각을 전달하는 도구가 아니라, 우리가 세계를 인식하고 이해하는 방식을 구성하는 핵심적인 매개체입니다. 특히 성별(gender)은 언어 속에서 반복적으로 호출되는 사회적 범주로서, 언어 구조 속에 깊숙이 내재되어 있습니다. 스페인어는 대표적인 성별 기반 언어로, 명사, 형용사, 관사 등에 문법적 성(Género gramatical)이 일관되게 적용됩니다. 이 구조 속에서 남성형이 기본값으로 사용되며, 여성형은 파생형으로 취급되는 경향이 뚜렷합니다. 이는 단순한 문법 규칙을 넘어, 남성 중심적인 사고방식과 권력 관계를 언어적으로 정당화하는 장치로 기능합니다. 사회언어학적으로 볼 때, 언어는 권력을 유지하고 재생산하는 도구이며, 젠더 표현은 그 중심에 위치합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스페인어의 성별 표현 구조는 젠더 불평등 문제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으며, 이를 문제시하는 사회적 논의가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본 글에서는 언어학 이론과 문화적 사례를 바탕으로 스페인어 속 젠더 표현의 문제를 다층적으로 분석하고, inclusive language의 사회적 파급력을 조망해보고자 합니다.


2. 성별 언어 구조의 문제: 남성형 기본 원칙

 스페인어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모든 명사와 형용사에 문법적 성이 존재한다는 점입니다. 기본적으로 생물학적 성(sexo biológico)과 문법적 성은 일치하는 경우가 많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존재합니다. 예를 들어 "persona"(사람)는 여성형이지만 남성을 지칭할 때도 사용됩니다. 특히 문제시되는 것은 남성형이 기본값(unmarked form)으로 작용하며, 집단을 지칭할 때 남성형을 사용하는 관습입니다. 예를 들어 "los ciudadanos"라는 표현은 남성과 여성을 모두 포함하지만, 여성만 포함되는 경우에도 남성형을 사용하면 문제가 되지 않는 것으로 간주됩니다. 이는 데보라 카메론(Deborah Cameron)의 언어적 위계 개념과도 연결됩니다. 언어 구조상 남성형이 상위 개념으로 자리 잡으면서 여성은 가시화되지 않는 존재로 전락하게 됩니다. 이는 단순한 문법 규칙의 문제가 아니라, 언어적 구조 안에서 젠더 권력의 비대칭성을 드러내는 증거입니다. 심리언어학적 관점에서 보면, 이러한 표현은 언어 사용자의 무의식 속에 젠더 고정관념을 강화시키는 기능을 하며, 사회적 상호작용에서도 여성의 존재를 주변화하는 역할을 하게 됩니다. 결국 남성형 기본 구조는 성별 간 위계질서를 언어적으로 정당화하는 방식이며, 이는 성평등 실현의 큰 걸림돌로 작용합니다.

스페인어와 젠더 : 언어 속 성별 표현의 딜레마


3. 포괄적 언어(inclusive language)의 등장과 실험

 이러한 남성형 중심 언어 구조를 비판하며 등장한 것이 바로 포괄적 언어입니다. 특히 2000년대 이후 라틴아메리카와 스페인에서는 "todos" 대신 "todas y todos", "tod@s", "todes" 등 젠더 포괄적 표현이 확산되고 있습니다. 이는 단순한 언어적 유희가 아니라, 언어를 통한 사회 구조의 변화 요구라는 점에서 중요합니다. 언어학적으로 보면 이러한 변화는 촘스키(Noam Chomsky)의 생성문법 이론에서 강조하는 언어 사용자의 창의성과 규범 전복 가능성과 연결됩니다. 즉, 언어 규범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사회적 필요와 가치관에 따라 끊임없이 재구성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라틴아메리카에서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compañer@s", "niñes", "amigxs" 등 다양한 형태의 inclusive language가 등장하며, SNS와 대중문화에서도 널리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표현은 논바이너리 젠더 정체성을 인정하고 반영하려는 움직임이기도 하며, 소수자 권리 인식과도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실제로 아르헨티나는 2021년, 세계 최초로 공공 문서에서 성 중립 표현을 허용한 국가 중 하나로 기록되었으며, 이는 단순한 표현의 변화가 아닌 젠더 인권의 확장이라는 점에서 주목받고 있습니다. inclusive language는 여전히 논쟁의 대상이지만, 그 자체로 언어를 통한 사회 개혁의 실험장이 되고 있습니다.


4. 문화적 저항과 사회적 반응: 진보 vs. 보수

 포괄적 언어 사용에 대한 반응은 매우 양극화되어 있으며, 진보적 가치와 보수적 전통이 첨예하게 충돌하는 지점입니다. 스페인 왕립 아카데미(RAE)는 지금까지도 "todes"나 "elle" 같은 표현을 공식 문법에 포함시키지 않고 있으며, 이를 단순한 유행이나 문법적 일탈로 간주하고 있습니다. 반면 아르헨티나와 멕시코 등에서는 일부 교육 기관과 공공 부문에서 inclusive language 사용을 장려하고 있어, 제도권 내에서도 시범적 수용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보수 진영은 포괄적 언어를 '언어 오염', '전통 파괴', '좌파 이념 주입'이라고 규정하며 강하게 반대합니다. 일부 교육청에서는 inclusive language 사용을 금지하는 지침을 발표하기도 했으며, 실제로 포괄적 언어를 사용했다는 이유로 해고되거나 징계를 받은 교사들도 존재합니다. 이러한 상황은 언어 변화가 단순한 말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권력 투쟁의 연장선에 놓여 있음을 보여줍니다. 문화인류학적 관점에서 보면, 언어는 집단 정체성과 세계관을 형성하는 핵심 기제로, 이를 바꾸려는 시도는 항상 저항을 불러일으키기 마련입니다. inclusive language에 대한 논쟁은 결국 언어를 둘러싼 사회적 상상력의 재편성 과정이며, 그 진폭은 단순한 문법 논쟁을 넘어 정치적, 윤리적 담론의 장으로 확장되고 있습니다.


5. 언어와 사고: 사피어-워프 가설의 시사점

 포괄적 언어 논의의 철학적 기반 중 하나는 바로 사피어-워프 가설(Sapir-Whorf Hypothesis)입니다. 이 이론은 언어가 사고를 규정한다는 언어 결정론적 관점을 바탕으로, 사용하는 언어의 구조가 세계 인식에 영향을 미친다고 주장합니다. 이를 스페인어에 적용하면, 성별이 명확히 구분되는 문법 구조는 사용자에게 자연스럽게 성 고정관념을 내면화시키고, 이분법적 젠더 인식을 강화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모든 사물과 개념에 성을 부여하는 구조는 인간 관계와 사회적 역할에서도 성별을 자연스러운 구분으로 전제하게 만듭니다. 이는 언어와 현실 사이의 반영적 관계를 넘어서, 언어가 현실을 구성하는 근본적인 틀이라는 점을 강조합니다. 이러한 점에서 inclusive language는 언어 구조를 변화시킴으로써, 사고방식과 사회적 관계의 틀 자체를 전환하려는 시도입니다. 실제로 젠더 중립적 언어 교육을 받은 집단이 성차별적 편견을 덜 가지는 경향이 있다는 실험 연구 결과도 존재합니다. 따라서 언어 개혁은 사회 변화의 후속 조치가 아니라, 오히려 변화를 선도하는 인식의 토대가 될 수 있습니다. inclusive language는 젠더 정의 실현을 위한 언어적 전략이자, 평등한 사회 구조 형성을 위한 실천적 도구입니다.


6. 마무리 하며 : 언어의 변화는 사유의 변화를 이끈다

 스페인어의 성별 표현 구조는 단순한 문법 체계 이상의 의미를 지닙니다. 이는 남성 중심의 사고방식과 사회 권력 구조를 언어 속에 고정시키는 메커니즘이며, 여성과 성소수자의 가시성과 존재 가능성을 제약하는 요인으로 작용합니다. inclusive language는 기존 언어 규범에 도전하며, 젠더 평등을 언어적 차원에서부터 실현하려는 시도입니다. 물론 이러한 변화는 짧은 시간 안에 사회적 합의를 이루기 어렵고, 문법 규범과 언어 순응성의 문제도 여전히 존재합니다. 하지만 언어는 고정된 것이 아니며, 사회적 필요와 가치 변화에 따라 진화합니다. inclusive language는 비단 성소수자만의 언어가 아니라, 모두를 위한 언어이며, 이를 통해 보다 포용적인 사회를 만들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제시합니다. 젠더 평등한 언어는 단지 표현의 문제가 아니라, 사고방식의 전환이며, 이는 곧 제도적, 사회적 변화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단어 하나, 표현 하나가 세상을 다르게 보는 창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언어 개혁은 가장 강력하고도 조용한 사회 혁명이라 할 수 있습니다.